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모가디슈 전투 (문단 편집) ==== 어둠 ==== 급격한 부족주의 해체를 포함한 개혁조치들이 대부분 실패로 돌아가고 부족의 권한을 줄이는 것에 대한 반발로 쿠데타와 암살시도가 이어지면서 그의 [[흑화]]가 시작되었다. 집권 22년중에서 괜찮았던 초반 5년이 끝나고, 17년간의 폭정이 시작된 것이다. '''권력은 부패한다.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라는 이야기가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그는 집권 6년차인 1975년에 치안법원을 설치해서 사법권을 군사법원으로 만들어버렸고, 이에 반발하는 이슬람 지도자들을 처형하면서 악명을 쌓았다. 그리고 1976년에는 소말리아 사회주의 혁명당을 창당하면서 일당독재를 확립했다. 그리고 여기에 박차를 가한 것이 1977년에 시작된 [[에티오피아]]와의 [[오가덴 전쟁]]이다. 시아드 바레는 범소말리주의를 주장하면서 전군을 동원하여 에티오피아를 침공하였고, 소련이 소말리아보다 에티오피아의 손을 들어주자 소련과도 단교했다. 권력 욕심과 땅욕심에 제 뒷배를 차버린 시아드 바레는 당연히 오가덴 전쟁에서 패배했고, 이로 인해 궁지에 몰린 시아드 바레 정권을 향해 마침 아프리카에서의 소련의 영향력을 견제하고자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미국이 손을 내밀었다. 1980년에는 미군에 바르바라 항구의 사용권과 공군기지를 제공하면서 3,000만 달러의 경제원조와 4,000만 달러의 군사원조를 받기도 했다. [[오가덴 전쟁]] 패전의 영향으로 1982년부터 반정부 단체의 활동이 거세졌다. 오가덴 전쟁의 패전은 다른 지역에 살던 소말리 난민의 이동을 불러왔다. 경제는 더더욱 엉망이 되었고, 에티오피아와의 전쟁으로 피해를 본 소말리아 북부에 있던 부족들은 대놓고 정부에 반발을 시작했다. 이렇게 되니 시아드 바레는 '''과거에 천명했던 부족주의 타파를 정면으로 역행'''해서 오히려 자신이 소속된 약소 부족이었던 '마레한('''M'''arehan)'소부족[* 다로드 부족이라는 거대 부족의 일부였다. 시아드 바레는 마레한 소부족만을 지원했기 때문에 다로드 부족은 반대파에서 활동했다.], 범소말리주의의 중심에 있었던 '오가덴('''O'''gaden)족', 그리고 '둘바한테('''D'''hulbahante)족'을 자신의 측근세력으로 삼아서 중앙정계로 끌어들여 권력을 독점했다. 이 세력을 영어 약자를 따서 '''M.O.D.'''라고 부른다. 사실 오가덴 전쟁 전에도 소말리아 내부에선 범국가적으로 각 지역의 주도권을 쟁취하려고 파벌간의 싸움이 자주 있었다. 사실상 내전이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이 파벌간 싸움이 항상 있어왔기에 시아드 바레는 당연한 것으로 판단하고 전혀 간섭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가덴 전쟁의 패전으로 이 부족간의 파벌싸움은 소말리아 정부, 즉 바레 정권에 대한 반대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은 리비아의 지원으로 1978년 등장한 '''소말리구원민주전선'''(Somali Salvation Defense Force, 약칭 SSDF)이었고, 이어서 소말리아 국내에서도 시아드 바레에 반대하는 게릴라 세력들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자크(Isaxaaq) 부족이 주축이었던 '''소말리국민운동'''(Somali National Movement, 약칭 SNM)이었는데, 이들의 주요 거점은 '''시아드 바레가 미군에게 넘겨준 바르바라 항구'''였다. 미국 원조에 가장 핵심적인 지역에서 반정부 봉기가 일어나자, 발등에 불이 떨어진 바레는 그 해 즉각적으로 군을 움직여 이들을 소탕했다.[* 그러나 바레는 이들의 세력을 완전히 뿌리뽑지는 못했고, 이후 이자크 족의 SNM은 [[소말릴란드]]로 이어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